계획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최근에 가장 절감하고 있는 구절이다. 언젠가 전 세계 100여 개국을 누빈 여행자를 만나서 물었다."여행 후 깨달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는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나 또한 캐나다(Canada) 워킹 홀리데이(Working Holiday)를 준비하면서 무척이나 그 말을 실감했었다. 매년 초마다 올라왔던 모집 공고가 여름이 되어서야 공지되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졌었다. 덕분에 내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고, 좌절도 많이 했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였다.
친구
캐나다에서 일하면서 살기 시작한 지 한 달하고 보름이 지났을 때다. 내 페이스북 계정에 친구 신청이 들어왔다. 프로필을 확인해보니 나와 같은 캐나다의 캘거리(Calgary)에 사는 동갑내기 남자였다. 친구 수락을 하고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Johann Choi라는 캐나다 영주권자인 그는 내가 몸다고 있는 캐나다 캘거리의 리들스 사이클(Ridleys Cycle)에서 트렉(Trek)의 크로스트립(CrossTrip) 사이클로크로스를 샀단다. 그리고 다음 날 만나게 됐는데,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변기를 잡고 토를 하게 됐을 정도로 과음하며 불같은 밤을 보냈다. 우리는 그렇게 절친이 됐다. 마치 10여 년을 알아왔던 것처럼. 다음날도 봤고 지금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매주 마다 만나왔다.
밴프(Baff)
나 같은 워홀러들은 대부분 차가 없다. 이 때문에 캐나다의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려면 차를 빌리거나 불편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7년간 캘거리에서만 살아온 Johann Choi 덕분에 밴프 국립공원을 쉽게 갈 수 있었다. 애초 계획은 캔모어(Canmore)에서 밴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거였다. 하지만 오후 2시가 다 돼서 출발하는 바람에 목적지까지 쉬지 않고 내달렸다. 나는 그간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일하면서 적응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먼 타국에 온 것을 크게 실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직선으로 곧게 뻗은 고속도로와 드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동했다. 비로소 “내가 캐나다에 있구나”라고. 밴프 국립공원(Banff National Park)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 중 하나이면서, 1885년 설립된 캐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공원으로 로키 산맥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면서 종일 흐렸던 하늘은 결국 많은 비를 뿌려댔다. 불행하게도 캐리어에 실어 놓은 Johann의 새 자전거는 폭우를 맞으며 호되게 신고식을 치렀다. 하지만 밴프에 당도했을 땐 다행스럽게도 비가 그쳤다.
▲ 아기자기했던 밴프의 다운타운, 겨울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단다.
관광
Johann이는 유학생 시절 돈을 벌기 위해 다양한 일을 했는데, 그중 관광 가이드 아르바이트도 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을 캘거리에서 밴프까지 안내하는 일이었단다. 그는 기억을 되새겨 밴프의 주요 볼거리들을 보여줬다. 온천수가 있는 노천탕 '핫 스프링(The Canadian Rockies HOT SPRINGS)', 마돈나가 영화를 촬영했다는 '보우 폭포(Bow Falls)', 건축된지 120년이 넘었다는 살아있는 유적지 '스프링스 호텔(Banff Springs Hotel)' 그리고 골프장을 끼고 있는 예쁜 산책로까지. 밴프 국립공원은 아름답게 수 놓인 록키 산맥(Canadian Rocky) 사이를 만년설이 녹아 형성된 강과 예쁜 마을이 함께 어울린 동화 같은 곳이었다. 특히, '설퍼산(Sulphur)' 곤돌라는 급격한 경사를 오르내리고 있어 그냥 지나치기에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기에 다음에 오면 꼭 타보기로 마음먹었다.
▲ 마릴린 몬로가 주연한 <돌아오지 않는 강>에 배경이 된 보우 폭포
▲ 핫 스프링은 온천 문화에 익숙한 우리가 보기엔 작은 수영장이나 목욕탕을 연상케 하지만 이곳에서는 명소란다. 영하 30도에 날씨에 따뜻한 노천을 즐기면 색다를 것 같다.
▲ 마돈나가 영화 촬영 후 묵었다는 120년 역사의 밴프 핫 스프링스 호텔
추억
주요 볼거리를 다 둘러보았더니,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맑은 날씨가 우리를 반겼다. 알버타(Alberta) 주는 건조해서 해만 뜬다면 땅위의 물기는 놀랍도록 빠르게 마른다. 우린 밴프 공용 주차장에 주차하고 계획대로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캐나다의 여름은 저녁 아홉 시까지 해가 떠 있어서 늦은 시간까지 활동하기에 좋다. 그래서 비록 자전거를 차에서 내린 시간이 5시 즈음이었음에도 오후 1시 인 양 햇살이 쨍했다. 밴프의 마을을 둘러보면서 동화같은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자전거는 차보다 느리지만 걷기보다 빨라서 효율적으로 세세 한곳을 둘러볼 수가 있어 감동은 배가 됐다. 그렇게 무언가에 이끌린 듯 페달에서 발을 뗀 마을과 인접한 보우 강(Bow River)은 한 폭에 그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누구나 들어갈 수 있도록 카누 선착장을 개방해놓아 절경을 더욱 가까이서 볼 수가 있었다. 우린 그곳에서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추억을 남겨댔다.
별미
어느새 허기가 졌다. Johann은 관광 가이드 시절 그렇게나 먹고 싶어 했다던 3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멜리사의 미스테이크(Melissa's Missteak)로 가자고 했다. 우리는 호사롭게 30불 정도의 가장 비싼 스테이크를 시켰다. 그때의 우리는 무엇을 먹어도 다 맛있다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먹어보니 또 찾아와서 먹어야 할 정도의 감동은 없었다. Johann은 후식으로 치즈 케이크를 주문했는데, 되려 그 케이크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처음과 중간 그리고 끝 맛이 모두 다른 별미였다.
▲ 손수 한땀 한땀 만든 자전거의 첫 캐나다 라이딩을 잠깐이나마 영상으로 남겼다.
다짐
어느새 해는 로키 산맥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밴프를 감싸고 있는 로키 산맥은 마치 동양화를 잘 그리는 이가 화폭에 붓질한 것 같았다. 꼭짓점에 내려앉은 만년설과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바위산의 모습은 흑과 백의 자연의 조화를 알려줬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Johann에게 무척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없었다면 이렇게나 좋은 곳을 편하게 둘러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여행지에서의 계획되지 않은 만남은 뜻밖의 행운을 가져다준다. 그날 나는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와 모레인 호스(Lake Moraine) 등 밴프의 명소들에 대해 알아보다 잠들었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알고 갔었더라면 더 값어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는 만큼 뭐든지 깊고 넓게 보이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