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하던 여행의 오르가즘, 관음사로 한라산 애무하기
관음사 탐방로는 버스가 가질 않기에 개인차를 이용하거나 택시를 타야 한다. (버스를 타면 산천단 검문소에서 내려 40분을 걸어야 함) 하지만 예하게스트하우스는 매일 아침 7시에 관음사 코스를 향한 차량을 준비해주기 때문에 전날 이곳에서 숙박을 하고 준비된 차를 타고 관음사로 향하면 된다. 우리가 이곳을 마지막 숙소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비용은 1인 5천원이며 차량은 택시(TAXI)다.
전날 6시에 일어나기로 한 우리는 알람 울림에 맞춰 하나두울 일어났다. 병훈이는 내게 어제 수집해놓은 연락처, 한라산 관음사 안내소에 전화를 해 등반이 가능한지 알아보란다. 답은 가능하다만 비바람이 심하게 불고 안개가 심하다고 한다. 어차피 어떤 날씨든 등반만 가능하면 오를 작정이다. 1층 공용주방서 조식을 준비한다. 달걀을 굽고 토스트와 치즈 오렌지 주스(커피)가 아침 식사다. 토스트에 치즈를 올려 잼을 바르곤 거기에 계란 프라이을 넣어 포만감 가득하게 먹어둔다. 이 양식이 백록담으로 이끌 힘이 되어 줄 것이기에.
식사를 마치고 정리를 한 후 리셉션으로 가서 5천원의 보증금을 지급하고는 아이젠을 대여하니 비로소 한라산이 가까워 진 느낌이다. 2011년 12월 8일은 나, 병훈이, Xing Jian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 굳은 날씨에 이곳에서 관음사로 향하는 사람들이 없다. 이제 예약한 차량이 도착하고 우리는 그곳에 탑승한다. 어제에 이어 오늘 새벽도 비가 부슬부슬 내려 땅이 몹시 젖어있다. 우중충한 날씨에 셋만 힘들다는 코스로 가려니 마음 한켠이 무겁다. 하염없이 창밖만 처다보고는 서로가 말이 없다.
▲ 도착한 관음사(觀音寺) 탐방로 입구는 인적이 없어 외롭기 그지 없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둑어둑한 택시 안에서 지도를 켜 보니 점점 한라산으로 다가가고 있다. 가파른 언덕길을 굽이굽이 오르던 택시는 이내 관음사 휴게소에 우리를 내려다 놓고는 무심히 떠나간다. "수고하세요!"라는 기사님에게 향하는 한마디의 말과 함께 비장한 각오를 한 '세 남자'는 한라산 앞에 섰다. 전기줄에 청승맞게 까마귀 한마리가 앉아 우리를 반긴다. 인기척이란 우리 일행과 방금 전 도착한 9명 정도의 산악 동호인 이렇게 해서 총 12명 가량이 이날 관음사 탐방로를 통해 한라산 정상에 등반한 전부다.
이처럼 등반 인원들이 적은 이유는 관음사 코스의 대중교통의 부재가 가장 크다. 그 다음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해발 1,950m의 하늘과 맞닿았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오르기 쉬운 산이 바로 한라산인데 총 7개의 코스중 가장 힘든 코스가 바로 관음사 탐방로라 관광 목적으로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오르는 이들은 이 코스를 꺼리기 때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판악으로 올라 관음사로 내려오거나 성판악으로 올라 성판악으로 다시 내려온다. 우리가 등반한 날 역시 백록담 정상에 도달하여 성판악으로 내려가니 성판악 탐방로를 통해 사람들이 무진장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이었다. 관음사로 등반한 사람은 12명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세어 보진 않았지만 극단적으로 비교하면 성판악으로 오르는 사람은 120명은 되는거 같았다.)
이처럼 비주류 코스 관음사를 선택한 이유는 남들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을 좋아하고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어 하는 내 인생관도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제주 한 바퀴 돌고나서 울산으로 돌아갈 땐 다시 비행길 타야 하는데 성판악으로 내려오면 시간과 숙소 잡는 것 그리고 자전거 일주 코스 포인트 따위의 자질 구레한 모든것이 어긋났고 결정적으로는 힘은 들지만 그만큼 수려한 경관으로 보상 받을 수 있다는 정보에 "그래 가자! 관음사!"로 결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산 만난 산짐승처럼
본능에 이끌린 남극의 '황제 펭귄'처럼 길을 찾아 한발 한발 내딛기 시작한다. 일어나자마자 전화한 안내소의 정보와는 다르게 비도 바람도 없었지만 땅은 젖어있고 안개에 시야가 흐리다. 한라산은 동절기인 11월,12월,1월,2월은 12시까지 해발 1,500m인 삼각봉대피소에 도달해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통제한다. 만약 12시까지 도착을 하지 못한다면 다시 왔던 길을 내려가야 한다.
산속에 마땅한 숙박시설이 없기에 안전을 위한 통제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덕에 전문적으로 등산을 하지 않는 우리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초반 코스는 어린이들도 오를 수 있을 만큼 무난한 경사도다. 탐방로 주변에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자연교육 자료들이 듬성듬성 설치되어 있다.
분명히 이곳은 따스한 봄날이 오면 어린 아해들도 자연을 만끽 하며 뛰놀 곳인데, 지금 이 순간만은 ‘사일런트 힐‘에 나올법한 음산한 분위기가 만개해 있다. 자욱한 안개와 질퍽한 땅,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거진 하나같이 칙칙한 모습의 나무들은 왠지 모를 비장함마저 생기게 한다. 겨울의 이른 아침 산속의 상쾌함과 싱그럼 덜하다.
걷다보니 어느새 관음사 휴게소 먼발치서 본 산악동호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그들을 따라잡고 싶은 마음에 잰 걸음으로 따라간다. 어렸을적 부터 그랬다. 산을 오르는 건 왠지 자신이 있었다. 그 자신감에 생에 처음으로 올라본 북한산에 밥을 안 먹고 오르고 남들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촌 동생과 길을 잃고는 몹시 고생한 생각이 난다. 미디어에 하도 자주 노출되는 북한산이다 보니 동네 뒷산으로 치부한 것이다.
길을 잃었을 땐 휴대폰 안테나마저 뜨질 않아 조난당하면 어쩌냐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힘겹게 올라간 북한산은 내게 왜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이끌게 하는지 그 매력을 진하게 알려줬다. 아무거도 준비하지 못한 채 올라가 얻어먹은 막걸리와 사탕이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군대 훈련소서 먹은 초코파이와 비견될 잊을 수 없음이었다.
▲ 한라산 제일의 난이도와 경관을 자랑하는 관음사 탐방로의 초입, 대중적인 성판악 탐방로와는 많이 다른 자연친화적인 등산로가 좋다. (동영상)
고생을 해도 산에 대한 이상한 자신감은 나를 빠른 발로 걷게 만들었고 병훈이는 나보고 천천히 걸으라고 야단이다. 아직 시간이 많다며……. 나도 천천히 걷고 싶다. 그런데 여행중 쉬지 않고 끝없이 매일 저녁 한결같이 한라산(소주)을 마셔댄 덕분인지 한라산은 굳을 날씨를 방패삼아 아름다운 속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가 보다. 눈앞에 우거진 수풀림과 공포영화서나 느낄 수 있는 차가운 공기와 음산한 분위기는 내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만 한다.
사실 나와 병훈인 Xing Jian이 함께 동행하는 게 꺼림직 했다. 싱가포르는 산이 없어 등반 경험이 별로 없을뿐더러 그의 옷차림이 등산에는 영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거운 DSLR 카메라와 가방까지 지고 갔으니 우리 일행 중 가장 힘들었으리라, 그는 예상대로 가장 느린 걸음이었다.
나는 SIGMA DP1 하나 달랑 메고 아무런 짐 없이 올랐다. 짐이 많으면 등반이 어려우니까.. 병훈이는 끝까지 가방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했다. 변화무쌍한 산 날씨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 옷도 넣고 물병 등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가기 위해선 가방이 필수란다. 이렇게 준비가 철저한건 녀석과 친구 먹은 이후로 처음 본다.
나는 무조건 가방은 필요 없고 얇은 옷 겹쳐 입고 가면 된다고 했다. 이날 관음사 코스로 처자 시집가듯 몸만 덮썩 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자전거 저지 뒷주머니가 매우 유용하게 작용했다. 3개로 갈라져 있는 곳에 바람막이, 파워젤, GPS, 아이젠 등 각종 물품들을 꾹꾹 쑤셔 넣곤 필요할 때마다 꺼내 썼기 때문이다. 그게 가방이지 모.. 뒤에 있으니 백팩
▲ 이 계단을 보는 순간 아 드디어 고생길 시작이구나! 본능적으로 알게 됐다. (동영상)
1시간 정도를 걸으니 탐라계곡이 나타났다. 기괴한 암석들과 멀리 보이는 경사도 가득 높은 계단은 우리를 지옥으로 안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 보고 ‘Hell~'이라 말한다. 무슨 108 계단이라고 할 만큼 계단의 수가 많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조금씩 변하는 풍경중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다. 바로 계속 이어져 있는 구조물이다. 추정컨대 상단부로 어떠한 자재를 싫어 나를 때 사용하는 레일인 것 같다.
계단을 오르고 나니 점점 이곳이 관음사란 게 실감이 난다. 길이 좁아지고 경사가 가파르기 시작한다. 1시간 30분가량을 걸었을까 중간 쉬어라고 마련된 널찍한 쉼터에서 쉬었다. 이곳을 자주 왕래하시는 산악동호회분이 탐라계곡까지는 오를만 하지만 개미등 부터가 힘들어진다고 말씀하신다. 쉬면서 준비해간 파워젤을 섭취하며 요기를 한 다음 한걸음 한걸음 오른다. 산림에 하얀 눈이 서서히 나타난다. 위로 향할수록 눈은 세상을 덮기 시작한다.
▲ 서서히 나타나는 하얗게 쌓인 눈은 위로 갈수록 그 세를 더해갔다.
오르다보면 중간 중간 대피소로 칭해지지 않은 (관음사는 총 2개의 대피소가 있음 ‘탐라계곡대피소, 삼각봉대피소) 널찍한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면 굳이 가는 도중에 등산로서 쉬지 않고 올라가도 지칠만 하면 나타나기 때문에 숨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며 채비를 갖추기가 좋다. 우리도 또 하나의 널찍한 공간에 멈춰 섰다.
나무로 짜인 넓은 휴식공간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있고 높은 나뭇가지 위에선 까마귀 한 마리가 우렁차게 깍깍 거린다. 음산한 분위기에 까마귀 까지 울고 내 호흡은 더 거칠어지니 역시 가장 힘든 코스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눈이 오지 않는 싱가포르에서 온 Xing Jian은 깨끗한 눈을 보고는 "WOW FRESH SNOW!!" 흥분하기 시작한다. 많이 지쳐 보였던 그가 눈을 만나자 힘을 회복하는 거 같아. 다행이다.
차츰차츰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푸름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온 세상이 흰색으로 변해간다. 그 눈만큼 공기도 점점 차가워진다. 옆에는 표지판이 하나 서있다. 사망자 발생지점이란다. 발걸음을 내 딛으면서 이러한 등반객의 긴장감을 도모하는 표지판을 몇 개를 더 만날 수 있었다. '개미등' 이처럼 진정한 관음사 탐방로서 위용을 뽐낸다.
▲ 드디어 나타난 삼각봉 대피소 하지만 아무것도 팔지 않던 무인 대피소
진흙에 빠지고 미끄러지고 쌓인 눈에 발이 푹 들어가기를 수 없이 반복하며 가파른 경사를 힘들게 오른다. 다시 1시간 흘렀다. 고개를 들어다 보니 가파른 언덕위에 희미하게 건물이 스믈스믈 피어난다. 삼각봉 대피소다. 짙은 안개에 가린 삼각봉 대피소는 마치 우리에게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듯 하다. 백록담을 오르려면 바로 12시까지 이곳에 도달해야 한다. 도착하지 못하면 더 이상 오르지 못한다. 다행이 우리는 일찍 서두른 탓에 시간적 여유가 많다.
건물을 보고는 나는 병훈이에게 저곳에 가면 내가 인터넷 후기서 본 따스한 컵라면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컵라면은 고사하고 아무도 없는 무인 대피소였다. 그런 상업 시설은 관람객이 많은 성판악 탐방로에 있는 것이다. 하긴 관음사 코스서 상업 시설을 운영하면 그건 장사가 아니라 봉사다.
삼각봉 대피소서 만난 자랑스러운 산악동호인
대피소 안에 들어가니 탐방로 시작지점부터 함께한 산악동호인분들이 자신들의 짐을 풀어놓고는 간이용 가스버너로 불을 피우곤 생수를 부어 커피 물을 끓이시고 계신다. 처음엔 라면 끓이시는 줄 알고 엄청 부러워했는데 대피소가 취사 금지다. 부럽다. 몹시도. 아~ 저 분들이 저 따스한 커피 한잔을 드시기 위해 이렇게 힘든 길도 마다하지 않으시구나 싶다.
북한산 정상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마신 막걸 리가 생각난다. 한 아저씨께서 우리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신다. 울산에서 왔고 이 분은 싱가폴에서 왔으며 숙소에서 만나 함께 오게 됐다고 말씀드렸다.
지금부터 백록담 정상까지는 얼마나 걸리냐고 물으니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말씀하시면서 여기까지 아무런 정비가 없이 젊은 패기하나로 올라온 우리를 대단한 눈초리로 쳐다보신다. 스틱과 아이젠이 있냐고 물으신다. 스틱은 없고 아이젠은 가지고 왔다고 말씀드렸다. 경사가 가팔라 스틱이 필요할 텐데……. 말끝을 흐리신다. 그 말을 듣고는 우리 일행은 준비한 아이젠을 착용한다.
▲ 재충전을 위해 간식을 먹고, 진정한 겨울 한라산을 몸소 느낄 준비로 예하게스트하우스에서 빌려온 아이젠을 착용했다. 위 사진과 같은 형태의 아이젠은 위와 같이 발의 중앙에 오도록 착용해야 한다.
Xing Jian이 아이젠을 착용해 걸어본다. 그 걸 본 아저씨께서 얼음이 박히는 금속이 나온 부분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간 발의 앞볼을 기준으로 장착하는 줄 알았는데 아이젠이 발 중앙에 있어야 걷기가 쉽고 미끄러지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셨다. 병훈이 녀석은 집에서 가져온 아이젠을 신는데 예하게스트하우스에서 빌려온 나, Xing Jian의 아이젠과는 다른 형태다. 금속이 자잘하게 신발의 전체를 감싸는 형태로 걷기 편하게 되어 있다.
쉬고 있는 이곳 삼각봉대피소는 해발 1,500m다. 여기까지 오느라 허기가 진다. 준비해온 초코바로 요기를 달랜다.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찾아오는걸 느낀다. 따스한걸 먹고 싶다. 건너편 아저씨들이 먹는 커피가 먹고 싶다. 그렇게 앉아 있는데 한 아저씨께서 초코파이를 건네주신다. 감사하다. 거기다 아까 전 끓이신 따뜻한 물까지 주신다. 남은 물인데 버리면 아까우니 다 마시란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홀짝 거리며 다 마셨다. 한기가 좀 가심을 느낀다.
거기다 맨손인 Xing Jian을 보시고는 여분으로 가져오신 장갑까지 주신다. 추우니 끼라면서.. Xing Jian은 그분들이 매우 친절하다고 감사해 했다.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외국인 관광객에게 좋은 추억을 가져다주시는 산악동호인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분들은 관음사 탐방로를 등반하는 내내 봉지를 지참하시곤 남이 버리고 간 자잘한 쓰레기를 수거하시면서 올라가셨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한라산 관음사 코스에 쓰레기가 없구나 절로 들었다. 나도 먹고 남은 포장지를 주머니에 주섬주섬 쑤셔 넣었다.
자랑스럽고 멋진 산악동호회 아저씨 분들이 단체사진을 찍어달라고 말씀하셔서 단체사진을 찍어드리곤, 함께 남은 백록담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생에 처음으로 아이젠을 신고 등반을 하니 색다른 기분이다. 만약에 이분들을 만나지 않고 마음대로 아이젠을 신고 올라갔다면 앞으로 계속 빠지고 발 앞굼치가 들린 불편한 자세로 등반했으리라. 하얗게 물들고 오묘하게 낀 눈안개, 좋은 사람들, 맑은 공기 모든 것들이 감사하다.
▲ 소주 한라산이 아닌 사시사철 샘솟는 진짜 한라산 샘물! (동영상)
굽이굽이 길을 걷고는 용진각 계곡을 향해 내려가니 산과 산을 연결하는 커다란 다리와 함께 맑은 물이 샘솟고 있다. 이곳에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나온단다. 나는 거침없이 다가가 솟아 나오는 물을 마셔본다. 병훈이가 그거 먹어도 되냐고 그런다. 산에서 나오는 맑은 물인데 당연하지 그럼! 그동안 소주 한라산은 매일같이 마셔놓고는 한라산에서 샘솟는 진정한 한라산을 왜 마다하랴! 우리는 돌아가면서 물을 마셔본다. 상쾌하다. 어찌나 춥던지 물을 마시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던 손이 곧바로 어는 느낌이다.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이곳까지 힘들게 올라온 것이 맑은 물과 기막힌 경치에 말끔히 보상받는 느낌이다.
▲ 산과 산을 연결하는 ‘인도현수교’ 점점 풍경이 비현실적이다. (동영상)
고개를 돌리니 멋들어진 인도현수교가 놓여있다. 마치 판타지 게임 속을 거니는 느낌이다. 비록 짙은 안개에 눈앞에 세상이 보이지 않아도 다리 아래 멋들어진 풍경은 머릿속 상상만으로도 아름답다. 산과 산을 연결한 다리를 건너니 묘한 기분이 든다. 이곳을 지나니 경사가 심해지면서 아이젠 없으면 도저히 걸을 수 없는 길이 이어진다. 발을 잘못 디디면 푹푹 빠지기도 하고 나뭇 눈꽃은 지나치게 아름다운 표현이다. 눈들이 얼고 얼어 고드름이 맺혀 있는가 하면 눈이 바람에 날려 여기저기 엉겨 붙어 더이상 눈꽃이 아닌게다. 우두둑 우두둑, 휘이이잉~, 헉헉헉.. 발걸음 소리, 눈보라 소리, 거친 숨소리..
▲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 꿈속을 헤매는 것 같다. 조금 만 더 심해지면 화이트아웃? (동영상)
Whiteout
힘들게 오르는 순간 가슴이 탁 막히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맞이했다. 여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풍경 이 상태가 조금 더 심해지면 말로만 듣던 화이트아웃(Whiteout) 되버리는 것일까? 왕관릉을 오르고 있다. 경사가 심해 정말 힘들다. 그렇게 백롬담을 향해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데 하나두울 성판악을 통해 올라왔다가 관음사 코스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 지나치면서 인사를 한다. 그들의 머리에는 하나같이 머리카락에 눈꽃을 달고 있다. 내 머리 그리고 Xing Jian의 머리에도 어느새 얼음 결정체가 맺히기 시작하는 거 보니 정상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날씨가 좋았다면 이 높은 곳에서 보이는 한라산의 절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턴데 하얗게 물든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독특한 분위기와 이질적인 풍경이 본능적으로 위로 위로 발걸음을 이끈다. 고개는 계속 위를 바라보며 걷는다.
▲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다. 눈보라가 심하고 나무와 바위에 앉은 눈들은 바람에 흩날리고 엉겨 붙어 얼음이 되어 버렸다. (동영상)
▲ 하염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정상, 엄청난 눈보라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다. 백록담은 짙은 눈안개에 보이질 않는다. 이곳이 백록담이라는 표지판과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것으로 정상임을 짐작할 뿐이다. (동영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백록담
얼마나 걸었을까 엄청난 바람과 평평한 평지가 느껴진다. 사람들이 많아진다. 이곳이 바로 정상인 것이다. 분명히 백록담 정상인데 꿈에 그리던 백롬담은 하얀 백지를 보듯 아무거도 보이질 않는다. 마냥 그곳에서는 감당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눈보라만이 불어오고 있을 뿐이다. 양 팔을 펼쳐 그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는다. 짜릿하다.
우리들을 그렇게 번갈아 사진을 몇 장 찍고 도망치듯 성판악을 향하여 내려가기로 한다. 도저히 백록담 정상에는 올바르게 서 있을 수가 없을 만큼 블리자드가 심해서다. 조금 걸어 내려와서 몸을 살펴보니 온몸이 바람에 실려 온 얼음 결정체들로 하얗게 덮여 있다. 성판악은 관음사와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정상을 향해 올라오고 있다.
정상을 이미 맛보고 내려가는 길은 한결 가볍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면서 수 없이 올라오는 사람을 바라보며 한라산을 내려가니 무언가 자부심이 생긴다. 힘든 관음사로 올라왔다는 그런 자긍심? 성판악 탐방로는 등반길이 관음사에 비하면 잘 정비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눈을 워낙 많이 밟아 바닥이 딱딱하게 얼어있는 곳이 많아 무척이나 미끄럽다.
관음사 탐방로는 그에 비하면 사람들이 많이 오르지 않아 바닥이 얼어있지 않고 눈이 두껍께 쌓여있기만 하다. 등산로를 펭귄처럼 뒤뚱뒤뚱 걸어 내려간다. 올라오는 이들은 정상에서 눈보라를 맞아 온몸이 얼어 있는 내 모습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검은 점퍼를 입었으니 대비가 더 심했을 게다.
▲ 백록담 정상에 몇 분 있지도 않았는데 눈 범벅이 된 카메라. 이 이후로 디지털 카메라든 스마트폰 카메라든 심하게 낀 습기가 한동안 가시질 않았다.
이제 하산할 때가 온 것이오! 갈 길이 멀구려
나는 미친놈처럼 낄낄 거리며 그렇게 한참을 내려간다. 완만한 경사로를 내려가면서 느끼는 거지만 주변 경관이나 경치가 확실히 관음사와는 다르다. 내가 내려온 성판악 길은 날씨 좋은 날에 오면 구름이 만개해 있고 탁 틴 시야가 인상적인 곳이었지만 아무거도 보이질 않았다. 그저 하얗기만 했다. 조용히 자연을 느끼면서 내 작은 숨소리 하나도 들을 수 있던 관음사 탐방로와는 달리 성판악 탐방로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다.
그렇게 다들 파도에 휩쓸려 가듯……. 어찌 이렇게 같은 산인데도 다른 풍경일까? 잰걸음으로 한참을 내려가니 진달래밭 대피소가 나타났다. 이곳에는 컵라면과 커피 등을 판매하는 상업시설을 겸하고 있는데 입구에 분명히 아이젠은 벗고 들어가라고 공지 되어있음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그냥 걸어 들어가시고 계신다. 딱딱한 바닥은 아이젠으로 인한 상처투성이다.
▲ 초코바 자유시간은 배고플 때마다 꺼내먹으려고 가져온 것이다. 흰 봉지가 바로 쓰레기를 담아 가라고 컵라면과 함께 지급하는 물품이다. 이곳엔 쓰레기통이 없다.
한라산 컵라면과 규칙을 지키지 않는 소수 관광객들
컵라면은 그날그날 한정수량만 들여서 판매하여 1인당 1개만 판다. 가격은 1,500원 사실 내려가면 사먹지도 않을 맛없는 육개장 컵라면인데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것 밖에 팔지 않는다.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점심시간이라 워낙 사람들이 많아 의자에 마땅히 앉을 공간도 없을 않을 정도다. 이곳을 많이 와봄직해 보이는 40 ~ 50대 단체 관광객들은 이미 아래에서 먹을 음식을 싸들고 와 먹고 있다. 제발 음식물 쓰레기는 잘 되가져 갔으면 한다.
육개장을 다 먹고 다니 Xing Jian이 자신이 챙겨왔던 귤을 내민다. 고맙게 먹는다. 병훈이와 나는 전날 그에게 파워젤과 초코바를 나눠줬다. 그렇게 게 눈 감추듯 먹고 나니 돛대기 시장이 따로 없는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밖에 안 든다. 화장실에 가보니 화장실도 지저분하다. 아~ 관광객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지 씁쓸하다. 게다가 한라산은 금연인데 담배까지 피는 몰상식한 사람도 있다. 아무리 눈으로 뒤덮여 산불이 날 확률이 없다고 해도 뻔 하다 눈앞에 담배피지 말라고 적혀 있는데.. 참. 할 말이 없다.
이미 정상을 다녀와 다시 성판악으로 내려가는 이들과 우리 일행에 손에는 하나같이 먹었던 쓰레기들이 담겨있는 봉지가 들려있다. 양심은 살아 있다. 한걸음 내딛으면 내딛을수록 관음사로 등반하길 잘 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정신없이 내려가다 보니 잘 정비 되어 있는 길이 없어지고 바닥에 돌이 어찌나 많은지 가운데 부분만 툭 튀어나온 아이젠이 영 불편하다. 그래서 벗었더니 돌 위로 얼음이 얼어 미끄러운 게 아닌가!
▲ 워낙 많은 사람들이 걷다보니 눈이 다져져 꽁꽁 얼어버렸다.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져 크게 다칠 수도 있다.
나는 Xing Jian에게 이제부터 아이젠을 벗어도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내 말을 믿고 아이젠을 벗은 그는 한참이나 뒤에서 뒤뚱거리며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괜히 미안해졌다. 아이젠을 벗고 신는 일은 생각보다 번거롭다. 그가 올 때 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신으라고 말해준다. 아이젠을 신고 내려가는 게 좀 발바닥이 아프고 불편하더라도 미끈거리며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하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음사 등반로는 흙으로 되어 있어 발바닥이 아프지 않았는데 성판악은 바닥이 돌로 되어 있거나 혹은 나무로 등반로를 정비한 곳이 태반이다. 걷다보면 돌이고 다시 나무길이다. 질리도록 돌길을 걷다보니 무릎이 아파 죽겠다. 정신없이 내려가는데 열중하니 점점 눈은 없어지고 푸르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우박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번 여행 눈,비,맑은날,우박,안개,눈보라까지 모든 날씨를 다 경험한다.
▲ 돌이 많아서 성판‘악’인건지 “아이고 내 도가니~”를 연발하면서도 잰걸음으로 내려갔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른 해우소처럼
Xing Jian은 생에 처음으로 우박을 접한 거 같다. 나도 이렇게 제대로 된 우박은 살다 살다 처음이다. 그는 한참을 우박을 맞으며 걷다가 묻는다. 지금 내리는 게 눈인건지 비인건지 알고 싶단다. Ice Rain(hail) 이라했다. 병훈이의 가방 위에는 어느새 얼음 알갱이들이 한가득 이다. 어찌나 내려가는 길이 지루하고 긴지 (한라산 등산로중 가장 길다.) 병훈이와 나는 또 입에서 열여덟 숫자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잰걸음으로 뛰기 시작한다. 무릎이 아파도 어서 한라산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피곤하다. 돌길이 지겹다. 하도 돌이 많아서 성판‘악‘인가보다. 성판악 城板岳 : 오름의 동남쪽 사면으로 수직의 암벽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모습이 마치 널판지를 쌓아 성을 만든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성널오름'이라 불렀다. 관음사로 올라가는 거보다 성판악으로 내려가는 게 더 힘들다고 느껴질 때 즈음.
도망치듯 내려온 성판악 탐방로는 그렇게 끝이 났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르다고 하지 않는가? 그 말이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다만 정말 관음사로 오를 때와 성판악으로 내려올 때의 한라산은 극과 극이었다. 같은 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감탄사를 연발하던 입은 깊은 한숨으로 변했고 힘들어도 자석처럼 끓어 당겨 정상으로 이끌던 한라산은 어느새 우리를 재빨리 밀어내고 있었다.
▲ 성판악 휴게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을 통하여 한라산을 등반한다. 버스가 이곳까지 오고 등반로도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나 조금의 체력과 끈기만 있다면 백록담을 볼 수 있다.
이른 아침부터 오르기 시작한 한라산을 벗어나니 어느덧 시간이 3시가 지났다. 성판악 휴게소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으니 먼저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병훈이에게 전화가 온다. 5분 후 버스가 도착한다고 어여 나오라고 한다. 화장실에서 만난 Xing Jian에게 조금 뒤 버스가 온다고 뛰자고 했다. 저 멀리 버스가 온다. 그렇게 달려 헥헥 거리며 버스에 올라 도망치듯 한라산을 떠난다.
우리들은 몹시 지쳐 예하게스트하우스가 있는 제주시내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탄 버스가 몇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쨌든 종점(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숙소에 가까워 다행이었다. 모두들 버스에 내려 안도에 한숨을 내쉬며 걷는다. 건널목에 한국의 여학생 2명이 서 있다. 교복을 타이트하게 줄이고 치마도 짧게 해 멋을 한껏 부린 모습이다. Xing Jian은 치마가 짧다며 야단이다. 그는 어제 술자리서 한국 여자들은 참 예쁘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다 과학의 힘(의느님 덕분)이라고 말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체크인을 하니 리셉션의 직원께서 한라산 어땠냐고 물어보신다. 관음사 코스는 정말 힘들지만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려올 때의 성판악은 별로라고 했다. 그녀도 다녀온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맞장구쳤다. 그렇게 방에 올라가지도 않고 휴게실 소파에 너부러져 한라산에서 찍은 사진들과 동영상을 서로 감상한다. 병훈이는 왜 자기한테는 동영상 찍으라고 말 안 해줬냐며 난리다. 나는 "한라산의 아름다움과 그 순간을 간직하는데 사진보다는 영상이 제격이지!"라며 으쓱해 한다. 요즘 세상이 좋아져 스마트폰의 영상 녹화 화질은 너무나 훌륭하다. 참 좋은 세상이다.
▲ 무거운 Lowepro의 DSLR용 백팩과 Canon EOS 7D를 가지고 한라산을 오른 Xing Jian 덕분에 겨울 한라산에서 영원히 남을 순간들을 새길 수 있었다. 참 고맙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공유되는 아름다운 추억
Xing Jian이 자신의 아이패드를 룸에 가서 가져온단다. 그렇게 가져온 IPad2에 캐논 DSLR에 연결하더니 촬영한 사진을 바로 전송하고는 곧장 IPad로 보여준다. 우리들은 Xing Jian이 찍어준 사진을 보면서 "우~와~" 감탄사를 연발한다. 산을 오르내리는데 익숙하지 않은 그가 때로는 거슬리기도 했지만 무거운 카메라와 가방을 메고 고생해서 한라산을 함께 오르고 우리 모습도 찍어준 그가 새삼스럽게 무척 고맙다. 병훈이는 그가 사랑스러워진다고 농담한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사진을 많이 찍어본 나는 막상 좋은 카메라를 가져간 당사자는 그 장비에 찍히지 못하고 함께간 일행들만 주구장창 찍어주는 경우가 허다함을 겪어봐서 잘안다. 그래서 나는 간간히 그의 카메라를 달라고 하여 때로는 힘들어하고 때로는 환하게 웃는 모습을 찍어주었다. 지금 그의 페이스북,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내가 한라산에서 찰칵 촬영해준 자신의 모습이다. “머리에 흰 얼음이 얼어 밝게 웃는 모습” 그렇게 우린 서로의 추억 한 페이지를 공유하게 됐다.
단벌의 나는 진흙이 묻은 바지를 보고는 빨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병훈이와 나는 어제 빨았던 옷을 오늘도 다시 세탁기에 넣고 있다. 내일 울산으로 돌아갈 때 입기 위해선 어서 세탁해놓고 말려야 한다. 기능성 옷은 그런 게 좋다. 빨리 건조되니까 말이다. 자유 여행에선 역시 기능성 옷 위주로 짐을 꾸리는 게 좋다. 우리들은 각자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1시간가량을 눈을 부치곤 일어나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한다.
▲ 대우정식당에서 먹은 오분작돌솥밥, 맛이 그냥 돌솥밥 맛이었다. 인터넷에 후기가 많아 찾아갔더니 굳이 일부러 찾아갈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 가격은 9,000원 (대우정식당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1동 569-27번지 / 064-757-9662 지도)
어제와 같이 예하게스트하우스 주변 맛집을 검색해 보는데 Xing Jian 형에게 무엇무엇을 먹어봤냐고 하니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들은 이미 많이 먹어본 상태다. 고심끝에 무난하게 ‘대우정식당’으로 가기로 한다. 내가 먹은 음식은 오분작돌솥밥인데 오분작의 내장이 들어있어 식감이 좋다. 거기다 마가린을 넣고 싶은 만큼 넣어 비벼 먹는다. 가격에 비해 맛은 그저 그렇다.
병훈이는 해물돌솥밥을 시켰고 Xing Jian은 뚝배기를 시켰다. 그는 맨손으로 속살을 능숙하게 각종해물들을 건저 먹더니 국물을 수프 떠먹듯이 숟가락을 이용해 계속 먹는 그의 모습이 이채롭다. 한국 음식이 입맛에 맛는거 같았다. 힘들게 완주한 '한라산' 소주도 시켜 서로 건배를 했다. 병훈이와 나의 음식에는 시래깃국이 함께 나왔는데 나는 한국에서 이 음식을 Trash Soup 라고 부른다며 농담했다. 옆 벽에 각 유명인사의 싸인이 있다. 그 중 야구선수 박찬호의 싸인도 있어 그에게 '메이저리그 아시안 최다승 한국의 야구 영웅'이라며 이 사람을 아냐고 물어보니 모른단다. 싱가폴 사람들은 야구보단 축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거리를 걷는다. 날씨가 무척이나 춥다. 숙소에 도착하여 휴게실 소파에 앉아 해피하워 시간에 지급하는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한국인 한명이 앉으면서 말을 건다. 그는 인천에서 온 서른한살의 남자다. 아무런 계획 없이 자주 제주도에 온단다. 이번에는 게스트하우스 위주로 여행을 하고 있는데 여행 중에도 별 목적지가 없다. 여행지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계획 없이 훌쩍 떠나온 이들이 많다.
▲ 한라산 정상에서의 나 처럼, 그 어떤 시련의 눈보라가 닥쳐와도 두 팔 벌려 기꺼이 맞서주리
마음먹은 것은 도전 한다
몹시 피곤해 침대 자리에 누웠다. 한라산의 여파가 크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다. 병훈이는 마지막 밤인데 이대로 잘꺼냐고 그런다. 밖에 나가 여자라도 꽤서 같이 놀든가. 나가서 술이라도 마시자고 그런다. 나는 물밀 듯 밀려오는 피곤함에 안 되겠다고 거절했다. 다음날 일어나 어떻게 시간을 보냈냐 물어보니 녀석은 그렇게 맥주 한잔을 더 하고 컵라면을 먹고는 올라왔다고 한다.
주윌 둘러보니 반대편 아래층의 Xing Jian 형의 전기매트 전원이 꺼져있는 것이 보인다. 혹시 몰라 이 부분을 돌려주면 따뜻하게 침대가 데워진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한참을 있다가 내게 단수에 따라 뜨거움의 정도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어본다. 겨울이 없는 싱가포르는 이런 난방장비가 없을게다. 그간 며칠을 이곳에서 묵었을 텐데 전기매트에 존재를 몰랐었나보다. 우리가 떠나는 내일 그도 이곳을 떠난다. 그래도 그의 한국에서의 마지막 잠을 보다 따스하게 보낼 수 있게 해줘서 뿌듯한 마음이 든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어떠한 일을 할 때 항상 즉흥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으면서 여행을 할 때에는 왠지 떠나기가 두려웠던 거 같다. 돈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구체적인 일정과 예약을 짜야 된다면서 모든 일에 시작이 반인데 말이다. 고민하지 말고 시작하는 게 중요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에 나타날 위험을 감수하기 싫어 생각만 하고 시행하지는 않는다.
쉬는 동안 여행을 통해, 책을 통해 작은 것들을 깨달은 나는, 여전히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맴돈다. ‘잡념‘ 그래도 하나는 분명히 할 것이다. 마음먹은 것은 도전 한다. 결과는 그 후 감당하면 된다. 문을 여는 건 언제나 두렵다. 문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 말이다. 예측하지 말자. 넘겨짚지 말자. 일단은 열어보자. 생각은 그 다음에…….
▲ 2011년 12월 8일 스트라이다 제주일주 다섯째 날 [자세한 지도] : 오늘은 자전거를 한 순간도 타지 않았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한라산을 등반했다. 관음사로 시작해 성판악으로 완주하는 코스로 18.3km의 거리 한라산 국립공원 홈페이지는 이 코스를 주파할시 9시간 30분이나 걸린다고 표기하고 있다. 나는 8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한라산은 겨울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하는데 울라갈수록 변화하는 하얗게 변화는 풍경과 화이트아웃에 가깝던 환상적인 체험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에는 봄이나 가을에 다시 한 번 올라 백록담을 보고 싶다. 진짜 한라산을 체험하고 싶다면 관음사 코스로 반드시 오르시길! (한라산국립공원 : 관음사지구안내소 064-756-9950, 성판악사무실 : 064-725-9950,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