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자전거에 철학을 담은 예술가를 꿈꾼다. <영원사이클>(YOUNGWONCYCLE) 오영원
날 때부터 질겼던, 자전거 인연
아버지께서 자전거포를 운영하셨다. 그래서 늘 공구로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아버지께서는 “너 이거 잘못했으니, 자전거 빵꾸 때워”라고 벌을 내리셨는데, 그런 경험들은 ‘자전거만 아니면 된다.’는 부정적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자전거 기술을 배우는 데 아주 자연스러운 매개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은 경영과 대외관계에 신경을 쓰다 보니, 정비 감각이 많이 떨어져 ‘스스로를 미캐닉으로 불러도 될까?’라는 정체성의 고민을 이따금 한다.
군대 전역 후 보게 된, 한 영화에 등장한 오토바이가 너무 환상적으로 보였다. 곧장 오토바이 회사에 취직을 했고, 그로부터 몇 년 뒤 대배기량의 투어러와 스피드를 낼 수 있는 오토바이 판매 사업을 아버지의 자전거포 바로 옆에다 시작했다. 그때까지 내게 자전거는 오토바이보다 하등적인 탈 것에 불과했다. 강원도와 서울을 오가는 투어 중 우연히 자전거 동호인을 만났다. 나는 한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는 고생을 왜 하냐며 혀를 쯧쯧 찼었다. 한 참을 신나게 달린 다음, 붉은 신호등에 잠시 멈춰섰다. 그런데 조금 전에 만났던 자전거가 휙- 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 같은 순간이 10번이나 반복적으로 이어졌고 결국, 연료 보충을 해야만 했다. 오기가 생긴 나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스로틀 그립을 당겼다. 그러던 찰나, ‘참 생산적이지 못한 레저활동을 하고 있구나.’라는 회의감이 문득 들더라.
곧장 아버지의 자전거포에서 가장 좋은 산악 자전거를 꺼내 페달을 굴렸다. 기어를 변속 하는데 오르지 못할 언덕이 없을 거 같았고, 다운힐에서의 짜릿함은 그 무엇과 비교 할 수 없더라. 어느새 내게 오토바이란 자전거를 타기 위한 돈 벌이수단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차츰 매장의 물량은 오토바이에서 자전거로 대체됐고, 아버지께서 취급하시는 생활 자전거보다 전문적인 고급 자전거를 위주로 판매를 해내갔다.
▲ 자전거포를 운영하시는 아버지를 둔 오영원의 유년시절, 등하굣길에 민소매 하나 입고 쭈그려 앉아 일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부끄러웠던 소년에게 자전거는 그저 원초적이고 못마땅한 탈 것에 불과 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인생을 뒤바꿀 만한 짜릿한 순간들이 찾아왔고, 이제 자전거는 그에게 자신의 철학을 담을 수 있는 꿈과 열정의 결정체가 되었다.
한국 사이클 전문 시장의 1세대
2000년 초, 한강 라이딩을 하면 일주일에 로드 사이클을 한 대 정도 볼까 말까 했다. 그 조차도 외국인일 정도였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2001년, 가평 사이클 대회 참가를 신청하면서 사이클 동호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때서부터 매장에 진열된 자전거의 비율을 사이클로 늘려나갔다. 2004년에는 실제 매장 오픈 전 <영원사이클>이란 이름을 온라인상에 적극적으로 미리 알리기 시작했는데, 추후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사업을 전개할 때 큰 도움이 됐다. 2006년, 본격적인 독립을 위해 시장 조사를 해 보니 이미 알려진 매장들에 비하여 무엇 하나 경쟁력이 없더라. 고민 끝에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과 로드 사이클 전문매장으로 콘셉트를 잡고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내 이름을 건 <영원사이클>을 열었다. 사견이지만 트라이애슬론이 한국 로드 사이클 대중화에 상당히 기여했다고 본다.
무엇보다 사이클 시장이 크지 않았기에 관련 문화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적었다. 덕분에 선점효과를 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이클 문화를 알리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다. 어느 날 손님으로 찾아온 기자 덕분에 <월간 자전거생활>의 기고 제안을 받아 수락했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돌이켜 보면 업계 인맥도 넓어지고 매출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됐다. 매체는 한 달에 여섯 꼭지나 맡았을 정도였고, 주말마다 자전거 대회는 무조건 쫓아가 부스를 치고 무료 정비를 하며, 대회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아내 열심히 기고했었다.
한편, 최근 사이클로크로스(Cyclocross, CX)가 주류 시장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2003년에는 업계 사람들이 ‘변태 자전거’라고 불렀을 만큼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몰랐다. 당시 <오디바이크>에서 샘플로 들여온 <KONA>의 CX ‘Jake the Snake’를 내가 판매하겠다고 했다. 경쟁 상품이 없다 보니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15대를 더 주문했다. 매체 리뷰도 하고, 이색캠핑을 주제로 한 <KBS 무한지대 Q>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의욕적으로 산과 도로를 누비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혼자서 나름대로 사이클로크로스 문화를 키워보려 열심히 노력 했으나 힘에 부치더라. 돌이켜보면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화마가 할퀴고 간 영원사이클
아무래도 없던 시장을 개척한 매장이었기에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아주 없는 편은 아니었다. 사업도 조금씩 궤도에 올라섰다. 2006년 12월에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아서 지금의 당산동으로 확장 이전을 했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오픈 일주일을 앞둔 시점에 전기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했다. 하루 밤 사이 3분 1정도의 물건만 남긴 채 모든 것이 불에 타 없어졌다. 내부 열이 팽창하여 바깥 유리가 깨져버렸을 정도니까. 아직도 매장 곳곳에는 화마가 할퀴고 간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한줄기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더라. 정말 참담했다. 이대로 포기 할 순 없으니 주위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했다. “미안한데, 나 다시 회생하고 싶다. 공구가 없다. 잔금 결제는 나중에 할 테니 물건부터 주면 안 되겠냐”며 간절히 부탁했다. 그렇게 일어섰다. 이 자리를 빌려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
매장을 독립 했을 때, 아버지께서 당신의 피와 땀이 베여있는 공구들을 챙겨주셨다. 하지만 불이 나는 바람에 모두 타버리고 말았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자전거는 사람이 고치는 것이 아니고, 공구가 고치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런 공구들이 눈앞에서 사라지니 마음이 아프더라. 나는 순정 공구들을 각별히 아끼고 좋아했는데, <SHIMANO>나 60년대 <Campagnolo>사의 부품들을 고칠 수 있는 전용 공구들을 해외에서 조금씩 사서 모았었다. 마찬가지로 그마저도 모두 다 불타버렸다. 지금은 공구에 대한 미련도 애착도 남아있질 않다.
클래식 자전거를 전시한 박물관
여섯 살 때부터 탔는데, 나를 거쳐 간 자전거만 무려 100여대 남짓이다. 80년대 초였나 5단 변속기어가 달린 아주 값비싼 자전거가 있었다. 톱-튜브 중간에 마치 자동차와 같은 T자의 기어박스가 장착돼 변속 때마다 붉은 색으로 표시됐다. 또 다운튜브 쉬프터가 달린 자전거를 처음 접하신 아버지는 변속 세팅을 바르게 못하셔 밤마다 고뇌에 빠지시던 아련한 추억도 떠오른다. 초등학교 3년 때 <GIANT>사의 유사 BMX를 탔었다.
친구들의 자전거에 만화 캐릭터가 가득했던 그 시절, 나의 애마는 바퀴도 두꺼웠고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늠름한 자태를 뽐냈다. 그때의 자부심은 말도 못한다. 녀석을 타고 나가면 없던 자신감도 생겨났고, 마치 세상에서 한대밖에 없는 희귀품을 소유한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자전거 통학을 즐겨 하던 중학교 시절, 아버지께서 붉은색 <Cinelli>사의 로드 사이클을 선물해주셨다. 기억의 조각들을 되짚어 보니 <SHIMANO>사의 그룹세트에, 안장은 플라스틱이었고, 은색의 휠-세트에 엮어진 허브와 스포크들은 예술작품과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성인이 된 지금, 클래식 자전거들을 전시한 박물관을 열어보고 싶다.
철학이 있는 자전거, 정비를 할 때 느끼는 희열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요즘 나오는 자전거들은 경제적인 가격대에 좋은 품질까지 겸비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좋은 걸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나오는 자전거들은 판매를 위한 상품성이 강한 제품을 만드는 게 최우선적이다 보니 과거보다 철학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원론적으로 돌아가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 했을 때, 처음 안장 위에 올라 페달을 굴렸을 때의 그 느낌들이 담겨 있는 자전거. 즉 수제 자전거가 만든 이의 철학과 노력이 담겨 있어 가치와 완성도가 높다 생각한다. 기술적으로 따지자면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칼 같은 얼라이먼트가 기준이라 볼 수 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남들이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변속 세팅과 같은 일반정비 말고, 프레임이 완전히 돌아간 것을 바르게 교정 하거나, 기성부품을 교체 하는 것이 아닌 가공을 하는 작업들 말이다. “영원사이클은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거 같아 찾아왔다.”는 말을 들으면 무척이나 힘이 나더라. 또 내가 기술적으로 뛰어났다기 보단 사이클리스트가 몇 없던 시절부터 로드 사이클 열풍이 불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버텨왔단 것 밖에 내세울게 없다. 바르다고 믿고 있는 나의 신념들이 조금이라도 시장에 영향을 미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제주 아이언맨 대회를 선수가 아닌 미캐닉으로 참가한 경우가 많았었다. 트라이애슬론 대회에서 미캐닉이 하는 주 업무는 차를 타고 가다 호출이 오면 선수의 머신 트러블을 해결 하는 것이다. 경기 중 한 동호인이 엘리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웅을 겨루는 것을 인상 깊게 봐오던 찰나, 때 마침 그의 자전거에 문제가 생겼더라. 행어가 교정 불가능 상태로 휘어지고, 체인 또한 끊어졌었다. 그에게 다가가 “수영에서 일찍 나온 것을 봤는데, 안타깝네요.”라고 말했더니 땅을 치더라. 그의 완주를 돕기 위해 나름대로의 기질을 펼쳤는데, 뒷디레일러를 제거하고 체인을 모두 끊고는 싱글 주행이 가능케 했다. 결국 그는 완주를 이루어냈다. 집으로 돌아와 몹시 보람찬 마음으로 컴퓨터를 켜 보니 “정비하는 녀석이 늦게 도착해서는 체인까지 다 잘라버려 입상을 놓쳤다.”는 불만섞인 글을 동호회 게시판에 올렸더라. 조금의 회의감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자전거 업계의 개선점, 브랜드 YOUNGWON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지만 자전거 매장 역시 양극화가 심한데, 모두들 판매를 통한 이윤창출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다 보니 자전거에 대한 전반적인 깊이가 부족하단 생각이다. 또 장인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버팀목이 될 만한 여건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거 같아 아쉽다. 공임 역시 쉽게 받기가 힘들고 소비자들의 인식도 아직까지 부족하단 생각인데,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가 아닌가 싶다. 또 정비 기술과 같은 매장 저마다의 특색과 가치를 따지기 보다는 가격에 의해 시장이 좌우되는 게 안타깝다. 무엇보다 아버지께서 자전거 하나로 가족들의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 해오셨는데, 그런 것들을 대기업이 침범한다는 것에 마음이 상한다.
매장을 독립하면서부터 프레임 빌더로서 이름을 알리고자 꿈꿔 왔었다. 스스로가 만족할만한 정성과 철학이 담긴 프레임을 만들기 위한 욕심으로 가득하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 줄 수 있는 상품성을 지닌 커스텀 프레임 <YOUNGWON>(영원)을 주류 시장에 반드시 남기고 싶다. 그래서 한동안은 선반도 깎고 CNC도 만지는 등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는 빌딩을 할 수 있는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영원사이클 경영에 더욱 집중하고 확장시켜, 이 같은 꿈을 펼쳐 보이고 싶다.
단단한 신념이 있다면, 장인이 될 것
미캐닉 룸에 ‘5년을 하면 흉내를 내는 것, 10년을 하면 조금 하는 것, 20년을 하면 자연스럽게 예술을 하게 된다.’는 문구를 붙여 놓았다. 언제나 한 가지에 있어 포기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결국 그 사람은 예술가(장인)가 될 거라 생각한다. 나 또한 자전거를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다 믿는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항상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로 “그들보다 일찍 일어났고 늦게 문을 닫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말이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더라. 항상 부지런하길 바란다.
http://baqui.co.kr/ (Bicycle Lifestyle Magazine, baqui)
http://www.youngwonbike.com/ (영원사이클,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6가 121-59 당산빌딩 1층 02-6085-9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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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보고 따라하는 자전거 정비 (2007, 한국자전거미캐닉협회, 자전거생활 편집부)
로드 바이크의 과학 : 사이클의 원리를 알면 자전거가 더 재미있다 (2009, 후지노 노리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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